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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줄/마케팅, 브랜딩

브랜드로부터 배웁니다 | 김도영

by Archive A 2024. 2. 22.

사진 출저 : 중앙일보

 

욕망을 코딩한다는 것 | 젠틀몬스터 GENTLE MONSTER

 

근데 전 이게 저 혼자만 가진 특성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사람은 실현 가능성과는 무관하게 각자 저마다의 상상으로 점철된 공간들이 마음속 어딘가에 자리 잡고 있다고 보니까요. 그 안에는 어마어마한 재력을 갖춘 내가 있기도 하고, 수백만 명의 인스타그램 팔로워를 보유한 내가 있기도 하죠. 어디까지나 공상이긴 합니다만 그 밑바닥을 잘 뒤져보면 사실 모든 건 우리의 욕망과 직간접적으로 맞닿아 있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세계적인 광고대행사 사치 앤 사치 Saatchi & Saatchi의 공동 창업자인 찰스 사치 Charles Saatchi는 이 공간을 '욕망의 방들 rooms of desire'이라고 표현하기도 했죠.

 

저는 브랜드도 그런 역할에 큰 부분을 차지하는 것 같아요. 꼭 그 브랜드의 제품을 소유하거나 사용해보지 않더라도 저 브랜드가 내 안의 어느 지점을 건드리면 그로 인해 나도 잘 모르고 있던 욕망이 서서히 제모습을 갖춰갈 때가 있거든요. 그래서 저는 브랜드가 가진 중요한 역할 중 하나는 '타인의 욕망을 디자인하는 것'이라고 봅니다. 그 역할을 어느 정도 디테일하게, 어느 수준까지 생동감 있게 할 수 있느냐에 따라 브랜드가 가지는 입체감이 결정된다고 보고요.

 

개인적으로 젠틀몬스터의 성장 과정이 곧 자신들의 욕망을 확인하는 과정이기도 또 타인의 욕망을 디자인해주는 과정이기도 하다는 생각에서입니다. 더불어 그게 어느 예술가 한 사람의 독창성에 기인한 역사가 아니라 촘촘한 전략과 끊임없는 혁신으로 설계된 결과물이라는게 더 매력적인 것 같고요.

 

사실 젠틀몬스터는 태생부터가 사업적인 전략으로 탄생한 브랜드입니다. 당시 영어캠프를 운영하는 회사에 다니던 김한국 대표님이 새로운 먹거리로서의 신사업을 론칭하는 조직에 있었기 떄문이죠. 정육점 사업을 포함해 10여 개가 넘는 사업계획서를 제출하다가 가장 막판에 제안한 사업이 바로 안경테를 만드는 아이웨어 분야였던 겁니다. 그렇게 자본금 5,000만 원을 가지고 안경 제조업으로 세운 법인이 '스눕바이'라는 회사였고 평범한 회사원이던 김한국 대표님은 하루아침에 자신과 전혀 인연이 없던 아이웨어 사업을 이끄는 수장이됩니다.

 

그런데 이 평범한 직장인은 자신의 평범함에서 브랜드의 방향성을 발견하게 됩니다. 뭐 하나 특별할 것 없이 평범하지만 늘 조금 더 다르게, 조금 더 낫게를 갈망하고 사는 자신처럼 사람은 누구나 저마다 다른 삶을 꿈꾸고 산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죠. 그리고 이런 욕망은 잘 정제된 것이 아니라 매우 원초적이고 본능적인 것임에 주목하게 됩니다. 

 

실제의 삶은 젠틀하게 살더라도 내면에 감춰진 몬스터적인 욕망은 표출할 수 있도록 해주자는 의미에서 브랜드명을 '젠틀몬스터'로 정한 그는, 보다 실험적이고 추상적인 개념들을 제품 디자인으로 구현해낸다는 뚜렷한 목표를 세웁니다.

 

물론 처음부터 승승장구할 리는 만무했습니다. 그도 그렇 것이 10년 전에도 이미 아이웨어 시장은 각종 명품 브랜드부터 기술력을 바탕으로 한 각국의 로컬 브랜드들, 새로운 트렌드를 발 빠르게 반영하는 신생 브랜드들의 각축장이었기 떄문이죠. 아무리 호기롭게 출발할 사업이라고 해도 넘어야 하는 산은 높고, 뚤어야 하는 벽은 두꺼운 상황이었습니다. 하지만 김한국 대표님은 처음부터 끝까지 이 '욕망의 표출화'에 사활을 겁니다. 이를 위해 스스로 밤낮없이 디자인 공부에 매달리고 좋은 인재가 있다고 하면 가장 먼저 발 멋고 나서 직접 영입해오는 열정을 보였죠. 이 험난한 경쟁 속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은 우리 자신을 뾰족하고 예리하게 다듬어 남들이 아직 눈치채지 못하고 있는 지점에 먼저 깃발을 꽂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 겁니다. 

 

사람들이 가진 그 몬스터스러운 욕망을 표현해주는 매개체를 굳이 제품에만 한정 지을 필요는 없다고 본 것이죠. 오히려 제품에 다 담을 수 없는 크고 자유롭고 담대한 이야기들을 보다 과감히 풀어낼 수 있다면 젠틀몬스터만의 스타일은 더욱 단단해질 거라는 판단에서였습니다.

 

그들은 그 답을 '공간'에서 찾습니다. 사실 많은 이들에게 젠틀몬스터는 웬만한 갤러리들을 압도하는 독특한 매장 스타일링으로 더 깊이 각인되어 있죠.

 

그럼에도 언제나 사람들의 호평을 끌어낼 수 있는 건 그저 '특이하나'는 평가로 단정 지을 수 없는 젠틀몬스터만의 가치관이 잘 녹아 있기 때문입니다. '상상을 현실로, 욕망을 비주얼로'라는 지극히 일관되게 이어오는 브랜드의 방향성이 바로 그 가치관의 핵심을 관통하고 있으니까요.

 

이러한 젠틀몬스터의 공간감을 알리게 된 데 가장 큰 역할을 한 건 2014년부터 약 2년 동안 홍대 플래그십 스토어를 기반으로 진행된 '퀀텀 프로젝트'일 겁니다. 젠틀몬스터는 한 번 스타일링하기도 만만치 않은 이 공간을 25일을 주기로 매번 새로운 테마와 콘셉트로 리뉴얼하는 프로젝트를 선보였거든요. 장장 36번에 걸친 전시를 진행하는 동안 비주얼 아트, 설치미술, 금속공예, 키네틱 조형, 팝아트 애니메이션 등을 각종 실험적인 사운드와 접목해 그들만의 스타일로 풀어내는 데 성공했습니다. 덕분에 사람들의 머릿속에는 단순히 아이웨어 브랜드가 아닌 거대한 크리에이티브 집단으로서의 젠틀몬스터가 자리 잡게 되었죠.

 

그뿐만 아니라 계동에 위치한 오래된 목욕탕을 전시 공간으로 활용한 북촌 플래그십 스토어 '배스 하우스 Bath House' 역시 큰 주목을 받았고, 코로나 19로 인해 모두가 오프라인 활동에 대한 투자를 꺼리는 시점에도 '젠틀몬스터 하우스 도산'을 오픈하며 또 한 번 충격을 안겼습니다.

 

특히 하우스 도산은 앞으로 미래의 리테일 공간들은 어떤 의미를 가지게 되는지를 젠틀몬스터만의 시각으로 재해석한 곳인데요. 1층에는 아예 제품을 전시하지 않고 거대한 조형물만을 직접 개발한 거대한 6족 보행 로봇 '더프로브'까지 배치하는 등 기술과 예술을 접목한 다양한 이야기들을 엮어내며 화제를 모았습니다.

 

그리고 2012년 4월에는 중국 상하이에 약 1,000명 규모의 단독 건물인 '하우스 상하이'까지 오픈하며 젠틀몬스터 공간 철학의 정점을 찍었죠. 특히 하우스 상하이는 순수예술에서도 쉽게 접근이 어려웠던 양자역학적 개념을 0과 1을 공간의 방향성으로 설정하고 더욱 파격적이고 실험적인 소재들을 배치해 자신들의 미래를 스스로 규정했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사람들은 때론 공간을 보는 것만으로 그 브랜드의 크기를 가늠합니다. 압도적인 공간 디자인으로 사람들의 인식을 선점하겠다는 것이 젠틀몬스터의 기초인 이유죠. 그래서 커다란 공간 안에 안경이라는 아주 작은 제품들을 어떻게 진열할까 하는 주제만으로 2년 가까이 연구하고 토론했습니다. 저는 공간이 감정이라고 생각해요. 그 공간속에서 느낀 감정, 새롭게 발견하게 된 생각들을 다른 사람에게 전달하고 싶어지게 하는 게 브랜딩이라고 보거든요.

 

제 친구 중에 광고회사를 다니는 녁석이 한 명 있는데요. 이 친구는 자타공인 안경 마니아로 알려져 있는 인물이기도 합니다. 반전은 이미 라섹 수술을 해서 기능적으로는 더 이상 안경이 필요 없는데도 불구하고 족히 수십 개가 넘는 각종 안경과 선글라스를 보유하고 있다는 거죠. 지금도 늘 새로운 안경을 사서 모으는 중이고요. 그런 친구에게 이른바 안경 마니아로서 젠틀몬스터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물어본 적이 있습니다.

 

젠틀몬스터는 재미있는 안경이지. 나도 여러개 가지고 있는데 희한하게 왠지 젠틀몬스터가 쓰고 싶은 날이 있거든. 나는 광고주 앞에서 PT를 많이 하니까 광고주 성향에 맞춰서 옷과 안경도 다르게 신경 써야 할 때가 있어. 근데 좀 과감해져도 좋겠다 싶은 날엔 무진장 특이하게 생긴 젠틀몬스터 안경을 써. 선글라스 클립까지 붙였다 뗐다 할 수 있는 안경인데 그걸 쓰고 가면 만나는 사람마다 다 물어봐. "와 안경이 정말 특이하네요!"라고. 그럼 그날 하루는 내가 엄청 용기 있는 사람이 된 거 같은 기분이야. 전에 못하던 새로운 것도 해볼 수 있을 것 같고. 그러니 이 안경은 나에게 뽀빠이 시금치 같은 거지.

 

저는 이 대답이 그간 젠틀몬스터가 보인 행보를 압축한 대답이라고 생각합니다. 만약 누군가 제게 젠틀몬스터의 브랜딩 활동을 정의해보라고 한다면 저는 '판타지를 코딩 coding하는 과정'이라고 답할 것 같거든요.

 

코딩의 가장 근본적인 개념은 어떤 대상에 기호를 부여하는 행위입니다. 그 기호는 언어가 될 수도 있고 상징물이 될 수도 있죠. 그러니 큰 틀에서 보자면 코딩은 자신의 원하는 의미를 전달하기 위해 끊임없이 기호를 만들어 붙이는 과정이라고도 얘기할 수 있습니다.

 

젠틀몬스터는 사람들이 가진 욕망 중에 저도 드러내고 싶고 실현하고 싶은 판타지적인 욕망들을 잘 선별해내는 브랜드입니다. 그리고 이를 자신들의 언어와 상징물로 변환해 기호화 하는 작업에 집중하죠. 떄론 그 기호가 걸작에 가까운 아트워크로 표현되기도 하고 눈이 휘둥그레지는 규모감의 공간으로도 형상화되어 사람들의 욕망을 더 또렷하게 구체화해주는 역할을 합니다.

 

쉽게 말해 '지금 당신의 마음속에 들어 있는 욕망이 이런 모습은 아닌가요?라며 과감하게 펼쳐놓은 다음 그 욕망을 대변하고 상징하는 도구로써 제품을 디자인하는 거죠. 그러니 안경 마니아 친구에게 뽀빠이의 시금치 같은 역할을 해주는 대상도 단순히 독특한 안경테라기보다는 젠틀몬스터가 내포하고 있는 과감하고 독창적인 찰나의 이미지일지도 모릅니다. 하루를 용기 있게 살아보고 싶은 열망을 압축해 스스로에게 부여한 기호가 바로 그 안경인 거니까요.

 

젠틀몬스터의 모회사인 아이아이컴바인드IICOMBINED는 2017년 '향'을 기반으로 한 코스메틱 브랜드 '탬버린즈TAMBURINS'를, 2019년에는 독특한 케이크와 디저트를 다루는 '누데이크NUDAKE'라는 브랜드를 차례로 선보였거든요.

 

탬버린즈는 핸드크림, 핸드 퍼품, 손 세정제, 향초 등의 스킨케어 제품을 취급하는데요. 이 역시 아이웨어보다 더한 대표적인 레드오션 시장으로 취급받는 영역입니다. 그런데 이번에도 젠트몬스터에서 보여주었던 그 독창적인 기법들로 단숨에 의미 있는 존재감을 만들어가고 있죠.

 

탬버린즈는 단순히 향의 주성분을 친절히 써주거나 팬시한 이르믕ㄹ 붙이는 방힉 대신 숫자 코드로 이를 전달하기 때문이죠. 가장 기본이 되는 베르마소, 패츌리, 샌달우드 등의 세 가지 향을 000으로 표기한 다음, 이들 각각의 향이 담긴 비율을 기반으로 숫자를 넘버링 하는 형식입니다. 다크하고 진한 여운이 느껴지는 제품은 325로, 청량한 소나무 향이 잘 배합된 향은 241 등으로 표기하는 것이죠. 덕분에 탬버린즈를 사용하는 사람들은 어려운 원료명 대신 숫자만으로도 자신에게 꼭 맞는 향을 차악할 수 있습니다 .이상적인 향기의 이미지를 숫자로 코딩해냈으니 가능한 일이겠죠.

 

한편 시작부터 큰 화제를 모았던 누데이크는 '디저트로 판타지를 구현한다'는 목표 아래 만들어진 젠틀몬스터의 식음료 브랜드입니다. 누데이크는 New, Different, Cake의 합성이인데요.

 

더불어 누데이크는 맛과 품질만을 내세우기보다 미디어 아트나 디지털 콘텐츠 등 매장 안의 다양한 요소를 활용해 '먹는 행위'에 대한 경험을 판타지의 단계로 끌어올리는 시도를 하고 있습니다. 단순히 예쁜 공간 안의 예쁜 디저트가 아니라 맛에 대한 욕망을 어느 수준으로까지 해석하고 표현할 수 있는지 자신들 스스로를 실험대 위에 올린 것이죠.

 

저는 브랜드를 들여다보는 재미의 정점은 이미 코딩된 무엇인가를 다시 풀어보는 디코딩 decoding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코딩을 하기 이전으로 돌아가 이 브랜드가 말하고 싶었던 것은 무엇인지 그리고 왜 그 메세지를 이런 코드로 엮어내려고 했는지 전반을 이해해보고 또 예측해보는 게 정말 흥미진진하기 떄문입니다. 

 

그런데 브랜드 하나를 깊게 파고 내려가 그 밑바닥에 있는 욕망과 마주하는 경험을 하고 나면 그떄부터는 브랜드의 작은 요소들까지도 허투루 보이는 게 업습니다.

 

그래서 저는 브랜드를 만드는 사람들은 어쩌면 일종의 게임을 설계하는 사람들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보드게임이나 방탈출 게임처럼 그 안에서 동작할 수  있는 룰을 만든 다음, 게임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다양한 코드들을 직접 풀 수 있도록 하나의 판을 디자인하는 게 브랜딩인 것도 같거든요.

 

대신 그 설계는 정말 촘촘하고 정교하게 이뤄져야 하죠. 게임을 하는 플레이어들이 너무 쉽고 뻔하게 미션을 달성하도록 해서도 안 되고 또 게임을 만든 사람만이 해결할 수 있을 정도로 지나치게 꼬아놓는 것 역시 매력도가 떨어지니까요. 보물찾이하듯 숨겨놓은 코드들을 하나씩 풀어가면서 우리가 진짜 보여주고 싶었던 원초적인 욕망들을 차례차례 만나게 해주는 게 가장 이상적인 브랜드 코딩이 아닐까 싶습니다.

 

저는 젠틀몬스터가 10여 년 넘게 이런 방식의 브랜딩을 할 수 있었던 이유도 브랜드, 제품, 공간이라는 세 가지 요소를 중심으로 균형 있는 게임을 만들고자  집중한 데 있다고 봅니다. 처음 젠틀몬스터의 그로테스크한 공간을 만날 때면 '이게 뭐지?'라는 낯선 충격에 휩싸이지만 곧 그 안에서 작동하는 룰을 이해하도록 만들고 그렇게 자신들의 세계관을 좋은 기호로 인식하게 해주니까요. 그럼 나중에 어디선가 젠틀몬스터의 선글라스 하나만 봐오 이전에 경험한 다채로운 요소들이 자연스럽게 떠오르게 되는 거죠. 저는 이게 브랜드로서의 코딩과 디코딩이 만들어내는 선순환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그들 사이에서 공통점을 하나 꼽아보라면 이런 이야기를 하고 싶습니다.

 

누군가의 욕망을 디테일하게 정의할 줄 아는 것. 그리고 그 욕망을 주제로 매력적인 게임을 설계할 줄 아는 것.

 

네. 물론 두 가지 모두 쉽지 않은 일이죠. 그리고 요즘같이 빠르게 브랜드를 선보이고, 수정하고, 뒤엎고, 되살리기를 반복하는 시대에서 모든 브랜딩에 이런 과정을 적용해볼 수 없는 것도 맞습니다. 하지만 여러분이 ㅙ 오랫동안 애정해온 브랜드가 있다면 그 브랜드는 위와 같은 문법으로 생명력을 유지하고 있을 확률이 높습니다. 

 

우선 내가 뭘 구현하려고 하는지를 명확히 하는 게 첫 번째예요. 그런 다음 그게 동작하려면 어떤 변수가 필요하고 데이터는 어떻게 사용해야 할지 같은 큰 배경을 예측해야 하고요. 그리고 저는 무엇보다 다른 코딩 사례를 진짜 많이 봐요. 그러면서 분석해보죠. '아, 저 사람들은 이런 문법을 사용해서 이렇게 기능을 구현했구나'라고요. 그 과정을 따라가다 보면 나는 어떻게 접근해야 하는지가 조금씩 보이거든요.

 

우선 내가 열고자 하는 욕망의 방이 무엇인지를 이해하고, 그게 갖가지 브랜드 요소로 코딩되려면 무엇이 필요한지를 예측해보는 거죠. 처음부터 이 과정을 실행하기 어렵다면 다른 브랜드들을 디코딩해보면서 ''아 저 브랜드는 이런 욕망에 이런 기호를 부여했구나'라는 나름의 분석을 곁들어보는 것도 좋겠씁니다.

 

그중 제가 가장 좋아하는 말은 '행복한사고 happy accident'라는 말입니다.

 

태도를 제안한다는 것 | 리모아 RIMOWA 

 

괜찮아요, 여러분. 생각했던 것과는 조금 달라졌지만 이게 또 우리에게 어떤 결과를 가져다줄지 모르니까요. 실수라기보다는 행복한 사고인거죠.

 

기획 일을 하는 사람들에게 잊을만하면 다시 찾아오는 질문 중 하나가 바로 '어떤 기획이 좋은 기획이냐?'라는 물음입니다.

 

만약 제 개인적인 생각을 묻는다면 저는 '누군가에게 새로운 관점을 열어줄 수 있는 기획'이라고 답할 것 같습니다.

 

꼭 가치관을 뒤엎을 정도의 거대한 임팩트는 아니더라도 '아, 저렇게도 생각해볼 수 있구나'혹은 '내가 그동안 이런 걸 놓치고 있었구나'라는 작은 생각의 여백을 마련해줄 수 있다면 거기서부터 또 무한이 확장되는 것들이 생기기 떄문이죠. 단번에 소비자나 사용자를 사로잡는 기획도 멋지지만 조금씩 우리를 향해 돌아서게 하는 기획도 결코 그 매력을 무시할 수 없으니까요.

 

그런데 오래전 스톱오버를 위해 잠시 들린 헬싱키 공항에서 제 관념에 작은 균열이 생기는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라운지에서 커피를 마시며 시간을 보내는 사이 제 건너편 자리에 똑같은 리모와 알루미늄 캐리어를 가진 두 남성이 우연히 같은 테이블에 앉게 된 것이죠. 한눈에 봐도 한 사람의 리모와는 세월의 풍파가고스란히 느껴질 정도로 온통 상처로 가득한 상태였고, 수많은 도시를 여행하며 붙였을 스티커들은 마치 대학시절 전단지로 도배되어 있던 학생회관 앞 게시판을 떠올리게 할 정도였습니다. 반면에 다른 한 사람의 리모와는 공장에서 갓 출고된 듯한 깨끗하고도 따끈따끈한 신상의 느낌이었죠.

 

그떄 풍파의 리모와 주인이 신생아(?) 리모와 주인에게 이런 말을 건넸습니다. 와! 완전 새것처럼 보이는군요. 리모와가 되려면 아직 조금 더 시간이 필요하겠어요.

 

맞아요. 아직 갈 길이 멀죠. 이 캐리어를 사고 처음 떠나는 여행이거든요. 앞으로 수많은 곳을 다니면서 여기에 기록할 예정이에요. 언젠가는 당신 리모와처럼 내 것도 멋진 흔적들 marks을 남기겠죠.

 

그리고 이어진 신상 리모와 주인의 답변을 듣자마자 저는 그게 리모와를 애용하는 사람들의 화법이자 관점이라는 걸 금새 알아차릴 수 있었습니다.

 

비교적 비산 가격에 해당하는 리모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줏단지 모시듯 애지중지하는 게 아니라 캐리어 자체를 여행의 기록물처럼 대한다는 것. 더불어 지금처럼 이렇게 우연히 리모와를 사용하는 사람과 마주쳤을 때 그 기록물들을 바탕으로 자연스럽게 대화를 나눌 수 있다는 것.이게 리모와를 대하는 사람들의 태도라는 사실을 서서히 느낄 수 있었으니까요.

 

무엇보다 제게는 단순히 푹푹 패인 상처이자 흠집으로 다가온 것들이 리모와를 쓰는 사람들에게는 멋진 흔적들로 인식된다는 것 또한 새로운 관점이었죠. 마치 그림을 그리는 과정 속 실수들을 행복한 사고라고 받아들이는 밥 아저씨처럼 말이에요.

 

캔버스는 물감이 올려지고 그린 사람의 흔적이 담길 때야 진짜 그 가치를 가지는 것인데도 말이죠.

 

사실 리모와는 브랜드가 발전해온 과정 자체가 '행복한 사고'와 함께한 여정이렀다고 말할 수 있는 브랜드입니다. 리모와는 1989년 독일 쾰른에서 파울모르스첵 Paul Morszeck이란 사람이 여행용 트렁크 회사를 설립한 것이 그 시초인데요.

 

사람들에게 잘 알려진 럭셔리 브랜드인 루이비통 Lousi Vuitton이나 고야드 GOYARD도 사실은 모두 마차에 싣는 여행용 트렁크를 만드는 회사로 출발했고, 그 대열에 리모와도 함께 자리하고 있었던 셈이죠.

 

뜻밖에도 그 속에서 전혀 다른 기회의 씨앗을 하나 발견하게 됩니다. 화제 후 공장 내부를 살피던 파울은 다른 재료들은 모두 불에 타버렸지만 일부 알루미늄 조각들만은 그대로 남아 있음을 알아챈 것이죠.

 

이는 단순히 디자인적인 요소를 넘어 기능적으로도 매우 우수한 장점이 있었는데요. 여러 겹의 그루브 문양이 적당한 마찰력을 발생시켜 짐이 쉽게 쏟아지지 않게 해줄 뿐 아니라 가방을 싣거나 운반해야 할 떄도 좋은 접지력을 유지할 수 있께 해 적은 힘만으로 이동이 가능했기 떄문이죠. 그리고 같은 해 리모와는 알루미늄과 구리, 마그네슘 등이 혼합된 '두랄루민'을 주재료로 한 토파즈 Topas 모델까지 내놓으며 리모와의 아이덴티티를 완벽히 갖추는데 성공합니다.

 

하지만 저는 리모아가 만든 세계 최초 상품들 중에 가장 인산적인 것은 바로 TSA 락이라고 생각합니다. 2001년 9.11 테러 이후 항공기 보안을 엄청나게 강화한 미국 교통안전국 TRansportation Security Administration이 도입한 검사 체계 중 하나인 TSA는, 짐을 스캐닝하는 과정에서 보안상 조금이라도 의심되는 점이 발견되면 그 즉시 트렁크 자물쇠를 부수어 내부를 확인할 수  있도록 하는 절차거든요.

 

이른 위해 리모와는 2006년부터 자물쇠를 부수지 않아도 마스터키 하나로 가방을 열고 다시 잠글 수 있는 TSA 락을 개발해 자사의 모든 가방에 부착해 판매하고 있습니다. 여행의 즐거움을 방해하는 그 어떤 행위도 그냥 놓아두지 않는 리모와의 철학이 가장 잘반영된 사례라고 할 수 있죠.

 

그러니 리모와가 지금껏 걸어온 시간은 '여행자가 오롯이 자신의 여행에 집중할 수 있도록 하는 데 모든 열정과 기술을 바친 시간'이라고 해석해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